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페인 독감 (문단 편집) == 발병과 대유행 == 기원에 있어서는 이견이 많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병사들이 귀향하기 위해 모여 있던 [[캠프]]에서 발병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3일 열병'이란 이름처럼 짧은 증상 기간 이후 단순한 [[감기]] 증상을 가지고 귀향한 병사들이 각지에 전파함에 따라 유례 없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기록에 의한 보고는 1918년 [[3월]] [[미국]] [[시카고]]가 최초다. [[3월 8일]] [[캔자스]] 퍽스톤 기지와 [[3월 11일]] [[미군]] 각 [[부대]]에서도 발병자가 발생했으니 출처를 따지면 스페인이 아니라 [[미국]] 독감이나 다름없는 셈. 비록 미국에서 최초로 보고되었으나 미국이 아닌 유럽 발원설, 중국 발원설도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Spanish_flu#Hypotheses_about_the_source|#]] 고병원성으로 발전한 것은 같은 해 8월 영국령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에서 발견된 것을 최초로 여긴다. [[킬 군항의 반란]]으로 [[독일 제국]]이 무너지던 시점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스페인 독감에 걸렸으나 빠르게 완치되었다. [[마하트마 간디]], [[레이먼드 챈들러]], [[월트 디즈니]], [[프란츠 카프카]], [[존 퍼싱]], [[프랭클린 루즈벨트]], [[우드로 윌슨]]도 스페인 독감에 걸렸으나 완치되었다. 그러나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막스 베버]], 기욤 아폴리네르, [[프리드릭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의 조부다.], [[베네딕토 15세]] 등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이 질병이 특히 무서운 것은 [[고대]]의 유행병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에는 질병이 냄새로 전파된다거나 피의 균형을 맞추면 병이 낫는다는 등 [[현대]]로 보면 괴상한 생각을 하였고 방역이나 위생 개선에 대한 의식은 고전적인 단계에 불과했다.[* 위생에 대한 의학적이고 체계적인 인식은 19세기에 와서야 시작되었다. [[산욕열]] 항목 참조.] 그러나 [[20세기]] 초의 사회는 이미 세균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있었고 공중 보건[* 상수도, 하수도 같은 공중위생시설은 물론이고 비말 전파를 막으려면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는 점이나 손을 씻어야 감염률이 떨어진다는 정보 등도 당시 이미 충분히 널리 퍼진 상식이었다.] 체계가 어느 정도 잡혀 있던 [[근대화]]된 [[사회]]였다. 그런데도 피해 규모가 가히 어마어마했다. 당시 [[세계 인구]]가 약 17억명이었는데 감염자는 약 5억명에 사망자는 최소 1,700만명에서 최대 5,000만명(총 감염자의 3~9%, 전체 인구의 1~3%)에 달한다고 추정된다. 사망자 수가 이렇게 들쭉날쭉한 이유는 진단할 겨를도 없이 야전에서 사망한 군인들과 합병증 사망자[* 사실 이 독감 자체보다는 허약해진 몸에 합병증으로 세균성 [[폐렴]]이 발병해 폐에 물이 차 숨을 못 쉬어 침대에 누운 채로 익사한 사람이 대다수다.]를 포함하지 않거나 행정력 미비, 정치적 혼란 등으로 인해 당시 제대로 된 통계가 없어 사망자를 추정할 수도 없는 [[인도 제국|인도]], [[중화민국|중국]], [[러시아 내전|러시아]] 같은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잡더라도 [[제1차 세계 대전|1차대전]] 사망자 수인 900만명의 2배~5배에 다다르는 사망자 수다. 심지어 일부 연구자는 스페인 독감의 유행이 1차대전의 종결을 앞당겼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33|#]][* 특히 이중 참호전에서도 발병되었다고 알려졌다. [[https://www.thescoop.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049|#]]] [[사모아]]는 인구의 90%가 감염되어 30%가 사망했고 [[이누이트]] 마을 몇 개도 몰살의 운명을 겪었으며 [[산마리노]]는 이 질병 하나 때문에 [[국가 멸망]]의 위기까지 갔다. [[일제강점기]]의 [[한반도]]에서는 "무오년 독감"이라고 불렸으며 1918년 가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대유행했다.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 의하면 당시 [[조선인]] 1,678만 3,510명 중 절반에 가까운 742만 2,113명(44%)이 감염되어 13만 9,128명(전체 감염자의 1.87%, 전체 인구의 0.83%)이 희생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인은 [[일본군|일본 제국군]]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일본 제국군]]에 조선인의 [[입대]]가 허용된 것은 [[문화 통치]] 후반인 [[1926년]]까지 가야 한다. 다만 [[홍사익]], [[이응준]] 등 [[일본 육사]]에 관비 유학을 가서 [[경술국치]] 이후 일본군에 편입된 일부 대한제국군 출신 인원이 있기는 하였으나 아주 극소수였으므로 이들이 원인일 가능성은 낮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1차 대전에 참전한 [[일본군]]이 조선에 다시 배치받으면서 대유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의 경우 34만 6,619명 중 15만 9,916명이 감염되었고 1,297명이 사망하였다. [[일본]]은 5,500만 명 중 2,500만 명(45%)이 감염되어 48만 명(감염자의 1.92%, 전체 인구의 0.87%)이 사망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최초 발병 보고 지역이 [[강계시|강계]]여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극동]]으로 전파된 뒤 다시 [[만주]]를 거쳐 유입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1918년 9월 들어 본격적으로 환자가 나오기 시작했으며 10월에 유행이 절정에 이르렀고 각 학교가 휴학했으며 단체와 관청이 업무를 보지 못했다. 11월 [[개성시]]에서는 사망률이 평소의 7배에 이르렀고 [[충청남도]]에서 특히 기승을 부려 [[예산군]]과 [[홍성군]]에서는 수천 명이 사망해 사망자를 처리할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고 추수를 못한 논이 절반 이상이었다. 또 [[서산시]]에서는 12월 기준으로 인구의 대부분인 80,000명이 독감에 걸렸다. 매일신보 11월 12일자에 따르면 [[경성부]]에서는 268명이 죽었고 그 중 조선인은 119명이었으니 조선인의 사망률이 낮았다. 이 자료는 당시 조선총독부 자료로 실제론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에 있던 [[김구]]도 이에 감염되어 20일간 앓았다고 [[백범일지]]에까지 기록해 두었다.] 같은 달 평양에서도 인구의 절반이 감염됐고 집배원들이 감염되어 업무가 마비된 우체국이 속출했다. [[https://news.v.daum.net/v/20200131172103968|신동아: 스페인 독감, 식민지 조선을 휩쓸다]][* 단, 기사에 나오는 삼중현(三重縣) 조우정(鳥羽町)은 현 [[미에현]] [[토바시]]로 조선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는 지역이다.] 당시 [[3.1 운동]]이 벌어진 원인에는 조선총독부의 무능한 방역 대책도 한몫했는데 자신들의 무능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사망했지만 오히려 조선인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를 보이며 한창 고조되던 [[반일]] 감정을 부채질했다.[* 이는 3.1 운동의 근본적 배경이었던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시애틀]]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승객의 대중교통 탑승을 거부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0/06/165-WW-269B-11-trolley-l.jpg/741px-165-WW-269B-11-trolley-l.jpg|#]] 또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미착용 시 경우에 따라서는 유치장에 며칠 가두기도 했다. 일본 [[도쿄도|도쿄]]에서는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고 시민들은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d/1919FluVictimsTokyo.jpg|#1]][[https://news.v.daum.net/v/20200406153530792|#2]][* 소설가 [[시가 나오야]]는 1919년 스페인 독감을 소재로 한 <유행감모(流行感冒)>라는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아메리칸 사모아]]에서는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총독]] 존 마틴 포이어(John Martin Poyer)가 [[라디오]]를 통해 듣고 내린 해외 여행객 입국 금지 조치 때문이다. [[세인트헬레나]] 같은 일부 고립된 지역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런 끔찍한 수의 사망자가 나왔음에도 치사율이 1.87% 정도밖에 되지 않았음이 역설적으로 매우 높은 감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지역별 차이는 있어서 고립되거나 의료 체계가 낙후된 지역은 이보다 치사율이 더 높았고 사모아 등 일부 고립된 지역에서는 최대 20%에 달하는 치명률이 나오기도 했다.] 만약 감염된 환자가 주변에 [[에볼라|감염을 시키기도 전에 단시간 내 바로 죽는다면]] 치사율은 높지만 도리어 감염 전파력이 떨어지는 감염의 메커니즘을 생각해 보자. 이렇게 전 세계를 휩쓸며 맹위를 떨쳤던 스페인 독감도 총 3번의 대유행과 몇 차례의 소규모 유행 이후 최초 발병 이듬해인 [[1919년]] [[4월]] 즈음해서는 상당 부분 종식되었다. 어떻게 해서 종식된 것인지는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으나 [[집단 면역]] 형성[*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대응이 장기전으로 흘러가면서 백신 미접종자의 존재와 시간에 따른 백신 효과의 감소로 인해 백신만으로는 집단 면역을 형성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나왔고 백신 접종에 더해 감염력은 크고 증상은 약한 변이 바이러스가 지배종이 되어 자연 감염에 의한 면역 획득이 더해져야 유의미한 집단 면역이 형성될 수 있다는 이론이 설득력을 얻고었다. 스페인 독감 당시에는 백신이 없었으므로 오로지 자연 감염만으로 집단 면역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이 된다.], 유전자 변이[* 바이러스가 변이하면서 대체로 감염력은 높아지고 치명률은 낮아진다는 것이 정설이다. 결국 바이러스는 종의 생존과 번식을 우선하지, 모 [[Plague Inc.|전염병 게임]]처럼 숙주의 절멸을 원하는 [[하이브 마인드|군체의식]]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검역 격리와 방역의 효과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일부 지역에서는 [[1920년]] 봄 4차 웨이브가 있었다. 주로 미국, [[유럽]], [[남미]] 등지에서 심각했고 일본에서도 1920년 3월까지 유행했다. [[디트로이트]], [[밀워키]] 등 일부 지역은 1918년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내기도 했다.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당시에도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무증상 감염과 사전 격리 조치를 취한 사례가 빈번했고 이에 따른 사회적 반발과 물류 마비, 자영업의 고난 등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 당시와 비슷한 사회적 현상 및 대중들의 인식들이 나타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